(KOR) 동시성의 규약성을 통한 특수상대성이론의 상대적 명제의 자연스러운 해석
2022년 봄학기 포항공과대학교 시공간과 물질의 철학 수업 과제로 작성한 글입니다.
특수상대론에 의하면 동시성은 상대적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한 관찰자에게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관측되는 두 사건이 다른 관찰자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관측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동시성의 규약성 테제에 의하면 동시성은 자연의 근본적인 속성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동시성의 규약성 테제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다룬다. 동시성의 규약성을 받아들이면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한 불필요한 가정을 소거하고 상대적 진리에 대한 부자연스러운 해석을 피함으로써 더 나은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
우리는 실생활에서 동시성의 개념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다루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렇지만 이러한 직관적 판단은 때때로 오해를 낳으므로 동시성의 상대성과 규약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만약 뉴턴역학에서 가정하는 것처럼 빛이 무한히 빠른 속도로 전달된다면 동시의 정의는 명확할 것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면 관찰자는 그 사건을 무한히 빠르게 볼 수 있기 때문에 관찰자 입장에서 그 사건은 본인이 그 사건을 관측한 순간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빛이 유한한 속도를 가지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 동시를 정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빛의 속도로 1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건을 관측한다면 관찰자는 그 사건이 1분 전의 자신과 동시에 일어났다고 추측해야 한다. 즉 빛의 속력과 사건으로부터의 거리를 통해 그 빛이 언제 출발하였는지 추측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동시가 정의되어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표준 동기화를 이해하면 동시성의 상대성이 어떤 의미인지 받아들일 수 있다. 표준 동기화란 서로 떨어져 상대적으로 정지해 있는 두 시계 \(A\)와 \(B\)가 있을 때, \(A\)와 \(B\)가 동시를 가리키도록 동기화하는 사고 실험이다. \(A\)의 시계로 시간 \(t_A\)에 \(A\)에서 \(B\)로 빛을 보내고, 빛이 \(B\)에 도달한 후 다시 \(A\)로 되돌아왔을 때 \(A\)의 시계가 \(t_{A}'\)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고 하자. 이 때 \(B\)의 시계를 \(A\)에서 출발한 빛이 \(B\)에 도착하는 순간이 \(t_A + (t_A' - t_A)/2\)가 되도록 설정하는 것이 표준 동기화이다. 즉 빛이 \(A\)에서 출발해서 되돌아오는데까지 \(t_A' - t_A\)의 시간이 걸렸으므로, 빛이 \(B\)에 도착할 때까지 그 절반인 \((t_A' - t_A)/2\)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보고 결과가 관측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보정해 시계를 동기화하는 것이다.
\(A\)에서 \(B\)로 이동하고 있는 관찰자 \(C\)의 입장에서 이러한 표준 동기화가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보자. \(C\) 입장에서는 \(A\)에서 \(B\)로 빛이 이동하는 동안 \(B\)가 빛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이동했고, \(B\)에서 \(A\)로 빛이 되돌아가는 동안에는 \(A\)가 빛이 다가오는 방향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C\)는 빛이 가는데 걸리는 시간보다 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더 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A\)와 \(B\)가 동기화에 사용한 보정치 \((t_A' - t_A)/2\) 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여길 것이다. 즉 \(C\)는 \(A\)와 \(B\)의 시계가 잘못 동기화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며, \(C\)가 판단하는 동시는 \(A\)와 \(B\)가 판단하는 동시와 다르다. 이렇게 뉴턴역학에서는 자명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동시의 개념이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널리 알려진 동시성의 상대성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동시성의 규약성 테제에 따르면 동시성의 상대성에 대한 위의 설명은 자연의 속성이 아닌 임의적인 규약에 기반하고 있다. 동시성의 규약성 테제란 빛의 일방향 속력과 동시성의 개념은 자연의 속성이 아니라 계산의 편의를 위해 도입한 규약이라는 명제이다. 위의 동시성 계산을 위해서는 빛이 한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가는 동안의 속력이 어떤 방향으로든 일정하다는 전제가 필요한데, 동시성의 규약성 테제에 따르면 빛의 한쪽 방향 속력은 규약에 불과하므로 계산의 결과가 자연의 속성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자연에서 측정 가능한 것은 빛의 양방향 속력, 즉 시계 하나를 사용해 빛이 특정 위치에 도달했다가 돌아오는 동안의 평균 속력 뿐이고, 빛의 일방향 속력은 측정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측정 불가능한 값은 자연의 근본적인 속성이 아니라고 믿었고, 빛의 일방향 속력을 \(c\)로 두는 것은 빛이 실제로 \(c\)의 일방향 속력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계산의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가정일 뿐이라고 여겼다.
아인슈타인이 빛의 일방향 속력을 측정 불가능하다고 본 이유는 이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동시가 정의되어야 하는데 빛의 일방향 속력을 모르는 상태로는 동시를 정의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빛의 일방향 속력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두 위치에 시계를 두어 빛이 한 위치에서 다른 위치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빛이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올바르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시계가 올바르게 동기화되어 동시를 가리키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두 개의 시계가 같은 시간을 가리키도록 동기화하기 위해서, 즉 동시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빛의 일방향 속력에 대한 가정이 필요하다.
표준 동기화를 다시 살펴보면 이 의미가 보다 명확해진다. 앞서 두 시계 \(A\)와 \(B\)를 표준 동기화하기 위해 \((t_A' - t_A)/2\)의 보정치를 사용했는데, 이 보정치는 빛이 \(A\)에서 \(B\)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과 \(B\)에서 \(A\)로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같음을 가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빛이 \(A\)에서 \(B\)로 가는 동안의 평균 속력이 \(\frac{2}{3} c\)고 , \(B\)에서 \(A\)로 되돌아오는 동안의 평균 속력이 \(2c\)라고 생각해 보자. 이 경우 \(A\) 입장에서 빛의 양방향 속력은 두 속력의 조화평균인 \(c\) 이므로 관측상 모순이 없으나, 동시를 계산하기 위한 보정치는 \((t_A' - t_A)/2\) 가 아닌 \(\frac{3}{4} (t_A' - t_A)\)가 된다. 빛이 \(A\)에서 \(B\)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B\)에서 \(A\)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의 세 배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소 인위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표준 동기화에서 사용한 수식이 빛의 일방향 속력에 대한 가정을 내포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렇게 빛의 일방향 속력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동시성이 정의되어야 하고 동시성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빛의 일방향 속력에 대한 가정이 필요하므로 둘은 모두 측정 불가능한 값이라고 보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견해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인슈타인은 측정 불가능한 값은 자연의 속성이 아니라는 조작주의적 관점을 택했고, 그에 따라 빛의 일방향 속력과 동시의 개념 모두 자연에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동시성과 빛의 일방향 속력을 정의할 수 없다는 위 논증은 시계 하나만 사용해서 빛의 일방향 속력을 측정하거나 빛의 일방향 속력에 대한 전제 없이 동시를 정의할 수 있다면 반박 가능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빛의 일방향 속력 또는 동시를 독립적으로 정의하고자 했던 시도가 성공한 적은 없다. 시계 하나로 빛의 일방향 속력을 측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도들은 실은 빛의 양방향 속력을 측정하는 것이었거나 암묵적으로 빛의 일방향 속력에 대한 가정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빛의 일방향 속력 없이 동시를 정의하려고 한 시도들 또한 암묵적으로 빛의 일방향 속력에 대한 가정을 사용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만약 동시성의 규약성이 여전히 결코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빛의 일방향 속력이 없다는 주장을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동시성의 규약성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흔한 오해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먼저, 빛의 일방향 속력이 어느 방향에서든 일정하지 않다면 시공간이 대칭적이지 않은 구조를 가지게 되므로 동시성의 규약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동시성의 규약성은 빛의 일방향 속력이 측정 불가능하다는 것을 넘어 그것이 자연의 속성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성의 규약성에 따르면 빛의 일방향 속력은 자연의 속성이 아닌 계산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붙인 값에 불과하므로 자연의 법칙과 무관하고, 따라서 대칭적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문제되지 않는다.
빛의 일방향 속력이 반드시 일정할 필요가 없음을 시사하는 예시로 빛의 일방향 속력이 모든 방향에서 일정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해도 물리적 현상을 기술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0\)과 \(1\) 사이의 임의의 실수 \(\epsilon\) 이 있고 어떤 관찰자 \(A\)에 대해 빛이 \(T\)의 시간 동안 멀어졌다 되돌아왔다고 하자. 이 때 빛이 멀어지는 동안 걸린 시간을 \(\epsilon T\), A로 돌아오는 동안 걸린 시간을 \((1 - \epsilon) T\)로 정하면 \(\epsilon\)-로렌츠 변환식을 얻을 수 있다. \(\epsilon\)-로렌츠 변환식은 흔히 알려진 표준 로렌츠 변환식과 겉보기에 차이가 있으나, 물리적 현상을 예측하고 계산하는데 있어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 하나의 오해는 빛의 일방향 속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빛 또는 물체가 위치를 이동할 수 있다는 우리의 직관에 상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시성의 규약성에 따르면 빛의 일방향 속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증과 똑같은 방식으로, 모든 물체의 일방향 속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증을 펼칠 수 있다. 즉 동시성에 대한 가정 없이는 어떤 물체의 속력도 측정 불가능하며, 따라서 자연의 속성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물체가 위치를 이동하는 근본적인 속성이 없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속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좁은 의미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이 명제는 시공간상의 사건에 좌표를 부여함에 있어 어느 정도의 자유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속도의 개념이 정의되려면 시공간에서 시간과 공간 좌표의 격자가 결정되어야 한다. 마치 미터와 초가 자연의 근본적 속성이 아닌 것과 같이, 시간과 공간의 단위의 연결 관계 또한 자연의 근본적 속성이 아니다. 빛의 양방항 속력이 일정해야 한다는 등 현실의 조건과 부합하기 위해서는 일부 제약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공간상의 각 위치와 방향에서 시간 격자의 간격, 즉 시간의 단위가 같아야 한다는 조건은 특수상대론에 없다. 뉴턴역학이 절대적 동시성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혼동하기 쉬우나, 좌표의 균일성은 임의의 시공간을 표현하는데 반드시 요구되지 않는다.
빛의 일방향 속력의 결정은 이러한 시공간 좌표계의 결정과 동등하다. 즉 빛의 일방향 속력이 유일하게 결정된다는 것은 시공간의 좌표계가 유일하게 결정되는 것과 같으며, 빛의 일방향 속력이 자연의 속성이 아니라는 것은 시공간의 사건에 좌표를 부여하는 방식이 자연의 속성으로 유일하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임의의 물체의 속력이 없다는 주장 또한 빛의 일방향 속력이 없다는 것과 동등하므로, 시공간의 사건에 좌표를 부여하는 방식이 유일하지 않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리하면, 빛이 일방향 속력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은 빛이 속력 없이 이동하는 특별한 지위의 객체라거나 물체가 운동한다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좌표 선택과 표현의 문제에 가깝다. 속력이 없다는 뜻은 속력에 대응되는 실수 값이 자연의 속성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물체가 운동한다는 개념을 부정하거나, 나아가 운동량 보존 등의 물리학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동시성의 규약성 테제에 명시적인 오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로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먼저 동시성의 규약성이 계산을 통한 현상 예측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깊게 고려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수 있다. 혹은 아직 관측되지 않았거나 직접 관측할 수 없더라도 모든 근거가 그것을 지지하기 때문에 빛의 일방향 속력이 \(c\)로 일정하게 존재하리라고 믿을 수도 있다.
나는 특수상대성이론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시성의 규약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빛의 일방향 속력은 특수상대성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으며, 이러한 불필요한 개념을 소거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 또한 빛의 일방향 속력의 존재를 가정하면 특수상대성이론은 관찰자에 대한 상대적 진리를 중심으로 기술되는데, 이러한 방식의 이해는 직관적으로 자연스럽지 않다.
먼저 특수상대성이론은 빛의 일방향 속력에 대한 가설 없이도 사건을 이해하고 기술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 자체로 어느 정도의 완결성을 가진 이론이고,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오컴의 면도날 원칙에 따르면 현상을 설명하기에 불필요한 가정은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이론에서 배제해야 한다. 따라서 빛의 일방향 속력은 자연의 속성이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하며, 설사 빛의 일방향 속력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그럴듯해 보이더라도 그 믿음이 관측되지 않은 가설이라는 사실은 명확히 인지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가설적 존재는 단기적으로는 직관적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설명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틀린 것으로 밝혀질 수 있는데, 그러한 경우 적극적으로 가설의 포기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에서 관측된 적 없는 가상의 예제이기는 하나, 국소적으로 민코프츠키 공간과 같은 원통형 시공간의 경우 빛의 일방향 속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더 나은 이해를 가져다준다. 원통형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상대론적 시간 지연 현상은 로렌츠 변환을 사용할 때보다 빛의 일방향 속력이 비대칭적이라고 가정한 상태로 새로운 변환식을 유도할 때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원통형 시공간에서 빛의 일방향 속력이 균일하다고 가정하고 로렌츠 변환을 사용하는 경우 하나의 사건에 대해 무한히 많은 시간 좌표가 결정되거나 명백히 동시에 일어나지 않은 두 사건이 같은 시간 좌표를 가지는 등,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발생한다. 하지만 빛의 일방향 속력이 규약의 결과임을 이해하고 이를 잘 설정하여 변환식을 구하게 되면 이러한 문제를 피할 수 있다.
나아가 빛의 일방향 속력이 자연에 유일하게 존재하리라는 가정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부자연스럽다. 빛의 일방향 속력의 존재를 가정하면 동시성을 포함한 많은 물리적 속성들이 관찰자에 대해 상대적으로 정의되는데, 기술 방식, 표현이 아닌 자연의 근본적 속성 그 자체가 상대적으로 존재하리라는 것은 우리의 직관과 상충하기 때문이다.
빛의 일방향 속력이 자연의 속성이라면 상대성이론은 상대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빛의 일방향 속력의 존재를 전제하면 앞서 논한 아인슈타인의 표준 동기화 방법은 자연의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 되고, 그로부터 유도되는 동시성의 상대성 또한 자연의 속성이 된다. 따라서 동시성의 규약성을 부정하는 특수상대성이론 하에서는 두 시계가 동시를 가리키고 있느냐와 같이 두 시계 사이의 관계로부터 절대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것 같은 명제가 관찰자를 포함한 세 객체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만 진술 가능해진다. 또한 물체의 속도나 거리의 측정 또한 암묵적으로 동시성에 대한 가정을 필요로 하므로, 동시성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제껏 두 물체 사이의 관계적 속성이라 믿어 왔던 많은 자연의 속성들이 실은 제3의 관찰자를 도입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관찰자의 상태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의되는 값이 된다.
이렇게 관찰자에 대해 상대적인 방식으로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이 직관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자연을 기술하는 방식과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이다. 자연을 기술함에 있어서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유효한 설명이 공존해도 이상하지 않다. 예를 들어 막대 하나가 있다고 할 때, 그 막대의 길이가 \(1\)미터가 될 수도 있고 \(3.28\)피트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직관적으로 자명하다. 하지만 하나의 사건에 대한 진실이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한 막대의 길이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주장과 달리, 막대의 길이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해석이 모두 참이라는 주장은 복잡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물체의 관찰자에 따라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길이를 가질 수 있다는 문장은 길이가 물체의 고유한 속성이라는 직관을 바꿔야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다. 빛의 일방향 속력이 일정하다고 믿기 위해서는 길이가 물체가 가지는 고유한 속성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관련된 물리적 표현을 재정립해야 한다. 물론 빛의 일방향 속력이 존재한다는 주장 자체에 논리적 모순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이상 이렇게 기존의 물리적 개념을 재정립하면 논리적 결함은 피할 수 있겠으나, 나는 그것이 용인 가능한 접근 방법은 아니라고 본다. 명백한 오류가 없는 기존의 물리적 개념을 재정립하면서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유의미한 이득 없이 과학에 혼란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길이가 물체가 가지는 고유한 속성이라는 것은 굳이 길이의 정의를 재정의하지 않는 이상 맞는 표현이고, 이를 전제로 한다면 빛의 일방향 속력이 있다는 가정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직관이 원하는 방식으로, 물체의 길이가 동시에 여러 값으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이해하려면 동시성의 규약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동시성의 규약성은 운동하는 관찰자가 보는 물체의 길이를 자연의 속성이 아닌 표현의 영역으로 환원시킨다. 즉 고유한 것은 물체에 대해 정지한 관찰자가 본 길이 뿐이며, 다른 길이는 자연의 속성이 아닌 기술 방식으로부터 얻어진 결과가 된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기술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접근을 통해 특수상대성이론을 부자연스럽지 않은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특수상대성이론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시성의 규약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동시성의 규약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빛의 일방향 속력이라는 자연스러워 보이는 개념을 포기하기 때문에 직관에 어긋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로 자연스러운 개념을 포기하는 것은 동시성의 규약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쪽이다. 빛의 일방향 속력이 있다고 믿는 것은 자연에 우리의 관측을 통해 투영되는 절대적 진실이 있으리라는 직관을 포기하는 것이며, 더 나은 이해의 여지를 포기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 Chunghyoung Lee. Simultaneity in cylindrical spacetime. American Journal of Physics, 88(2):131–136, 2020.
- Tim Maudlin. Philosophy of physics: Space and time 2012 princeton univ.
- Wesley C. Salmon. Space, Time, and Motion: A Philosophical Introductio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0.